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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23(일) 충타원 이명륜 교무 설교
우리 모두는 복을 받기를 원함. 그런데 복이 어디서 오는가? 인과품 19장 말씀에 복이 클수록 지닐 사람이 지녀야 오래간다 하셨음. 지혜 있는 사람은 복을 지을 줄도 알고, 지킬 줄도 알며 쓸 줄도 아는 사람임.
여러분께서는 오늘 우리를 깨우쳐주신 대종사님의 법문을 교무님을 통해서 들으려 왔지요? 지혜!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좌우하게 됨.
어떤 분이 친구의 소개로 맞선을 보게 되는 데, 지난 밤 꿈이 좋아서 오늘 보게 되는 사람 둘 중에서 고르게 될 것이라 어머니에게 얘기했음. 그래서 맞선을 보는데 오전에 본 사람은 막내에 인물도 좋았음. 오후에 보는 사람은 인물도 안 좋고 종갓집 종손이었음. 그런데 참 묘하게도 오후에 본 사람에게 마음이 꽂혔음. 그래서 지금까지 자식 낳고 살면서 하는 말이 “교무님 이럴 줄 알았으면 오전에 본 사람은 막내고 결혼 했으면 고생을 덜 했을 텐데요……. 그런데 제가 지혜가 부족해서…….”이렇게 후회하는 것을 들었음. 우리는 이렇게 순간의 선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지혜라는 것이 중요함. 그래서 우리들이 지혜를 혜월(慧月) 지혜의 달이라고도 함. 지혜의 달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내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것임. 여러분 모두는 지혜의 달덩어리로 온 천하를 다 비추고도 남을 현명한 판단을 하고도 남을 그런 지혜의 보물을 가지고 있음. 단지 우리가 구름에 가려서 안 보일 뿐임. 그래서 성가 28장 “언제다시 돌아갈꼬. 세세봉공 맹세한곳, 그리워라 나의 도량 내영혼의 보금자리.” 구름이 가리 워도 달은 한양 그 달이요……. 언제다시 돌아갈꼬 무얼 우리는 그렇게 바삐 사는지? 바퀴벌레도 처자식 먹여 살리고 우리도 처자식 먹여 살리려 바삐 사는데, 최적한 영을 가진 인간인 나는 인제 남은 인생을 위해 나는 무엇을 위해 바삐 사는지? 돌아갈 곳은 어딘지? 내 영혼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야죠.
 
대종사님께서는 천도품 24장에 저 하늘에 검은 구름이 걷히어야 삼라만상이 훤히 비추듯이, 네 마음에 욕심의 구름이 걷어버려야 지혜의 달이 솟아올라서 만세 중생을 제도하는 능력 있는 대 법사가 되라 하셨음. 여의보주를 얻을 수 있음. 내 구름만 걷히면 됨. 내 마음의 먹구름 걷히기 위해 왔음.
 
제가요. 서울을 갔다 오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가진 게 너무 많게 느꼈음. 가리면 탐심이잖아요? 마음의 구름이 탐진치 인데, 욕심의 검은 구름인데, 여수라는 좋은 환경, “교무님 명령만 내리십시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이런 교도님! 열심히 하시는 두 분의 교무님 원빈 간사, 부엌에서 일해주시는 교도님 세상에 복도 복도 이렇게 많은데, 어떤 원망생활하고 있느냐? 우리 보좌교무님은 조금 더 해줬으면 좋겠고 우리 부교무님은 그럴 수 있어? 원빈간사님은 이랬으면 좋겠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렇게 하다 보니 마음이 좁아지고 불평불만이 생기고 짜증이 나고 부딪히고 하는데 갑자기 마음이 부자가 되니 그러니 마음이 열렸음. 그래서 카톡으로 “원빈아 애썼지? 늘 고맙다.” 이렇게 하였음.
 
남편이, 자식이, 이래 주었으면 좋겠다고 욕심내면서 나를 닦달하고 있음. 제가 그렇게 하고 있더라고요. 꼼작이가 거적이라고, 병원에 누워서라도 살아계신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것임. 그 남편 그 아내 가고 나면, 신경질 내고 짜증낼 사람이 없다내요. 그러니 집에 계신 부처님께 잘 해주세요. 마음에 검은 구름이 탐심임. 바램이 걷히니 진심, 성질이 사라지고 성질이 사라지니 치심, 어리석음이 녹아지니 지혜의 달이 솟아올라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나는 것임.
 
그런데 그것이 얼마 못가요. 하루도가고 일 년도 가고 해야 되는데, 얼마 가지 못함. 지혜의 달이 나타났다 구름으로 숨었다 하기를 반복함. 우리의 마음이 이러함. 그러나 공부인은 심력을 씀. 구름이 가린 것을 애를 써서 빨리 알아차려서 빨리 도망가듯 목탁이라도 치고, “원불교가 나 죽이네!” 하면서 경계를 피하고, 피하는 마음의 힘을 쌓아서 지혜의 달이 솟아올라 그 복을 지키고 쓸 줄 알게 되는 것임.
 
오늘은 일원상 서원문중에서 “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사생의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이 부분을 가지고 얘기 할 것임.
육도에서 심상육도가 중요함. 현실과 생활육도는 저절로 되어짐. 여기서 포인트는 무상으로 보면 임. 나는 원래 지혜로운 사람이고 무궁한 내 복도 지닐 수 있는 능력자이나 욕심의 구름에 가려질 뿐임. 바램이 없으면 현실에서도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듯이 지혜로운 선택을 해서 후회하지 않는 진급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임.
유상으로 보면은 변하지 않는 나는 무어냐? 한마디로 나의 본심. 영혼임. 변하지 않은 그 내 본심, 영혼 이것이 어디 있느냐? 그걸 알아차리는 것 그것은 안변함. 절대 변하지 않는 것임. 그런데 오늘은 무상으로 보면 변하는 데가 있음. 나의 생각, 관념 알음알이 알아차림은 늘 변함. 내가 열린 만큼 받아들이게 되어 있음.
늘 변하는 내가 있음. 변하지 않는 나, 누구야! 부르면 대답하고 이렇게 알아듣는 나, 그것은 영혼은 변하지 않는데 나의 생각 관념은 나의 환경은 나의 분위기에 따라서 늘 변하는 내가 있음.
 
그래서 우리는 심신작용을 따라서 육도로 변하는 주체가 “나”라는 것임.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만물은 생로병사로, 사생은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하는 것임.
 
만물중에서 사생은 영을 가진 영과 기를 가진 생명체가 사생인데, 나는 심신작용을 따라서 내가 몸과 마음을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육도로 내가 나를 변화를 시키는데 그 일원이 누구냐? 내 영혼의 보금자리, “달은 한양 그 달이요” 했는데, 그 달이 내 영혼이고 성가 68장에 내 영혼의 보금자리라 한 것임. 내 영혼의 보금자리가, 나를 변하는 내가 어떻게 몸과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서 나를 판단하게 되기 때문에 “나의 재판관은 나다.” 하는 것임.
「나의 재판관은 나」 인데요, 앞에서 말하는 나와 뒤에서 말하는 나가 다름. 앞에서 말한 나는 내가 일생동안 오늘 하루 살면서 내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선업 악업도 있는 내가 있고, 앞의 나는 내가 지은 나이고 뒤의 나는 재판하는 나임. 지을 때는 내 마음대로 지으나 받을 때는 내 마음대로 받을 수 없게 됨. 앞에의 나와 뒤의 나가 다름. 앞에의 나는 심신작용을 하는 나이고 뒤에의 나는 재판하는 나임. 왜 재판을 하는 나는 인정사정 봐 주지 않음. 왜 그러느냐? 짓는 나는 인정사정 봐 줄려 하나 재판을 하는 나는 인정사정 안 봐줌. 그래서 우리는 “마음대로 지어라, 받을 때는 마음대로 못 받는다.” 무서운 말임. 내 편할 대로 지으나 받을 때는 마음대로 받지 못함. 왜 그러느냐면 일원상서원문에 이것이 나, 내 마음, 내 영혼이 이렇게(○) 생기고 이름을 일원이라 했는데 일원은 언어도단 입정처고 유무초월의 생사문인데, 나를 재판을 하는 나는 언어도단의 입정처이고 유무초월의 생사문임. 언어도단의 입정처는 진공의 나, 텅 빈 나 임. 그렇게 가만히 있느냐? 유무초월의 생사문이예요. “인정사정 봐 주지 않고 인과로 그대로 나투어진다. 그대로 판단한다.”는 것임. 재판하는 나는 이것이(○) 나를 재판함. 짓는 나는 본성의 나로 짓는 것이 아니라 습관과 업력으로 끌려진 내가 살고 있음. 그렇기 때문에 오늘 지혜의 달이 솟아오르기 위해서는 가린 구름을 걷어 내야 함. 그래가지고 이 지혜의 달이 솟아 오른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야 함.
 
우리 교도님들 “나의 재판은 내가 한다.” 현실의 내가 습관과 업력에 끌린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나의 본성은 나라고 봐주지 않는다.” “내 본성은 속일수도 없고 봐주지도 않고 아주 공정하게 재판한다. 나라고 봐주지 않는다. 그 대로 재판한다.” 그러기 때문에 나를 속이는 죄가 가장 무서운 죄이고 고백 중에 양심고백이 가장 아름다운 고백임. 오늘 함께 “나의 재판은 나의 본성이 해주되. 그 본성이 절대 봐주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저 일원상을 통해서 나를 보고, 저 일원상을 통해서 내 마음달이 솟아올라서 현명한 판단으로 그 복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마치겠음.